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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주치의] 씨앗을 지키는 사람

작성자
admin
2021-03-01
조회
592

씨앗을 지키는 사람 Keeper of the Seeds 


 


인류 대재앙과 씨앗 


2015년 한 때 강렬한 영상미로 화제를 모았던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얼마 남지 않은 물을 차지한 독재자 임모탄 조가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사막을 떠돌던 맥스(톰 하디)는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가고, 임모탄의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임모탄의 여인들과 함께 분노의 도로로 내달리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 중반에 이르면 퓨리오사가 임모탄의 여인들과 전투 트럭을 타고 가던 중 ‘부발리니’라는 부족을 만나게 된다. 이 부족은 퓨리오사의 고향인 물과 식물이 풍부한 녹색의 땅(The Green Place)에서 사는 모계 부족이다. 하지만 퓨리오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부족원들은 대부분 사망하고 고향 땅도 황폐화되었다는 진실을 듣게 된다. 


이 부족원 가운데, ‘씨앗을 지키는 사람’의 역할을 맡은 할머니(멜리사 제퍼)가 등장하는데, 바로 낡은 가방에 여러 식물의 종자를 소중히 가지고 다니는 부족원이다. 그녀는 녹색의 땅이 황폐해졌음에도 곡식, 과일과 채소, 나무와 풀, 꽃 씨 등 온갖 녹색 식물들의 종자를 가보처럼 잘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언젠가 물이 풍족한 땅을 되찾게 되면, 씨앗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일구어 낼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 영화 『매드맥스』의 한 장면, ‘씨앗을 지키는 사람’과 ‘씨앗 가방’ 


 


노아의 방주 씨앗 편 – 종자 금고(Seed Vault) 


현대 사회에도 ‘씨앗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부발리니’ 부족과 마찬가지로, 인류 대재앙(?)을 대비하여 종자를 보관하고 있는데, 바로 저장고(Seed Vault, 시드 볼트)다. 종자(Seed)와 금고(Vault)를 더한 단어로, ‘종자를 저장하는 금고’라는 의미다. 


식물유전자원을 가장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식물의 종자를 보전하는 것이다. 시드 볼트는 기후변화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식물의 종자를 영하 20℃의 조건에서 ‘영구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이다. 기후변화나 전쟁, 핵폭발 등 예기치 못한 지구 차원의 대재앙에 대비하여 야생식물의 멸종을 막는 것이 목적이다. 이 때문에 현대판 ‘노아의 방주’ 혹은 ‘최후의 날 저장소(Doomsday vault)’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편, 시드 뱅크(Seed Bank, 종자 은행)는 시드 볼트와 개념이 조금 다른데, 은행처럼 종자를 저장·보관하다가 필요에 따라 종자를 발아시키거나 연구하는 시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연구나 증식을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중·단기적’으로 종자를 저장하는 시설이다. 




▲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 https://techrecipe.co.kr/posts/14986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 볼트와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


시드 볼트는 세계에 단 두 곳밖에 없다. 한 곳은 2008년 2월에 설립된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에 위치한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 볼트(Svalbard Global Seed Vault)이고, 다른 한 곳은 2015년 12월에 설립된 대한민국 경상북도 봉화군의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이다.


우선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 볼트는 주로 작물종자를 저장한다. 기후 변화와 인간 활동으로 인한 종 손실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전 세계 기관과 시민단체가 시드 볼트에 씨앗 샘플을 기증하고 있다.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 볼트는 영구 동토층에 세워진 창고에 씨앗을 보관해 야생식물과 농작물 종 멸종을 방지하고 지역에서 멸종이 발생해도 종자 샘플에서 다시 재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 볼트는 2020년 2월 25일, 전 세계 35개 이상 국가기관이나 시민단체에서 6만 개 이상 씨앗을 기증받았다고 발표했다. 미국 원주민인 체로키족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9가지 씨앗[신성한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옥수수 씨앗(Cherokee White Eagle Corn)과 콩(Cherokee Long Greasy Beans), 호박(Cherokee Candy Roaster Squash) 등]을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기증했다. 또한 환경 보호에 앞장서는 것으로 잘 알려진 영국 찰스 왕세자도 자신의 사저 초원에서 채취한 27종류 씨앗을 기증했다.1) 또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도 첫 기증자로 이름을 올렸다.2)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는 야생식물 종자를 주로 저장한다. 야생식물은 말 그대로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작물보다 유전자 풀(Gene pool)이 다양하여 환경 적응력이 우수하다. 야생식물에서 다양한 기능성 물질이 발견되기도 하니 그 보관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는 식물을 자생지(현지) 밖에(외) 보전하여(ex situ conservation, 현지외 보전) 황폐한 산림의 복원을 대비하고, 이를 통해 국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실제 2020년 6월 30일 기준, 총 64개소의 기관(국내 49개소, 국외 9개국 15개소)과 협력하고 있으며, ‘203과 1,242속 4,046종 61,941점’이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에 영구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는 시드 볼트뿐만 아니라 시드 뱅크(Seed Bank, 종자은행)를 모두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3) 한편,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는 해발고도 600m의 지역에 지하터널형으로 설계(지하 46m)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강화 콘크리트(60cm) 및 3중 철판구조 골격으로 구성되어 지진에도 대비(규모 6.9 내진설계)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지하요새가 아닐 수 없다.




▲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 리플렛,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 볼트운영센터, https://www.bdna.or.kr/nanum/site/img/down/leaflet_kor.pdf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 볼트 보유중인 종자 - 꿀풀(Prunella vulgaris var. lilacina Nakai), https://www.bdna.or.kr/board/view.do?a_num=35749493&b_num=207482&rtn_url=%2Fboard%2Flist.do%3Fa_num%3D35749493


 


인류 대재앙을 준비하는 자세


‘동물’의 다양성 보존을 위해 ‘동결 동물원’도 역시 존재한다. ‘동결 동물원’도 시드 볼트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물의 다양성(샘플)을 저온 보존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는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이 손상되는 속도가 급속히 증가함을 피부로 느끼고 있으며, 본능적으로 그 위험을 대비하고 있다. 


영화 매드맥스 후반부에 씨앗들이 들어 있는 가방을 지켜왔던 할머니가 임모탄의 추격대와의 사투 끝에 목을 크게 베이는 치명상을 입는다. 그러면서도 ‘씨앗을 지키는 사람’은 뒷좌석에 있는 씨앗 가방을 가져와 품에 소중히 끌어안고 웃으며, 앉은 채로 생을 마감한다. 아마도 그녀는 언젠가 물이 풍족한 새로운 세상을 되찾게 되면 씨앗 가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일구어낼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씨앗 가방(시드 볼트)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씨앗 가방을 후대에게 물려줄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겠다. 미래를 위해 씨앗 가방은 준비하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후변화를 막을 개인의 작은 노력과 실천 의지임을 명심하자.


1)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저장수 100만개 넘었다”, TechRecipe, 2020. 3. 5., https://techrecipe.co.kr/posts/14986

2) 국립백두대간수목원도 첫 기증자로 이름을 올렸다. “Major Seed deposit at the Svalbard Global Seed Vault, Longyearbyen”, 2020. 02.25., https://www.croptrust.org/news-center/

3)국립백두대간수목원, https://www.bdna.or.kr/contents.do?idx=3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