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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주치의] 한국 최초 여성 의사, 박에스더 

작성자
admin
2021-11-26
조회
515

건강한 세상을 꿈꾸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다 

한국 최초 여성 의사, 박에스더 


매년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씰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 씰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박에스더와 셔우드 홀이 있다. 셔우드 홀은 박에스더의 죽음에 슬퍼하여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한국에 결핵요양소를 세웠으며, 1932년 결핵을 퇴치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한국 최초로 도입했다. 박에스더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희망이 된 것일까?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다


박에스더는 1877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이다.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의 소개로 188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으며, 영어 실력이 뛰어나 졸업 후 1890년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의 추천으로 보구여관(保救女館,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전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에서 의사이자 이화학당 교사인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을 맡았다. 이곳에서 그녀는 구순 구개열 환자인 10대 소녀가 로제타의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


로제타 셔우드의 남편인 윌리엄 홀은 선교 활동을 돕던 박유산을 박에스더에게 소개했으며, 두 사람은 1893년 정동교회에서 서구식 결혼식을 올렸다. ‘박에스더’라는 이름에서 에스더는 1891년 세례를 받으며 얻은 세례명이며, 1893년 박유산과의 결혼으로 남편 성을 따른 것이다. 한편 윌리엄 홀이 세상을 떠나자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 홀과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로제타는 박에스더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고자 박에스더 부부에게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권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박에스더는 1895년 리버티 공립학교에 등록하여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했고, 1896년 10월 최연소 학생이자 최초의 한국인으로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박에스더가 공부하는 동안 남편 박유산은 아내가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농장과 식당에서 일하며 뒷바라지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박유산은 박에스더의 졸업시험을 3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고생 끝에 그녀는 1900년 6월에 의대를 졸업하고 양의사 자격을 얻었으며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서재필, 일본에서 의대를 졸업한 김익남에 이어 한국의 세 번째 의사가 됐다.


 


환자들이 있는 곳에 젊음과 열정을 쏟다


박에스더는 의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로제타와 함께 일했다. 그녀는 보구여관에서 여성 환자들을 진료했고, 간호양성소를 설립했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 휴일도 없이 평안도, 황해도로 가마나 당나귀를 타고 진료를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수술로 환자가 치료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녀는 명의로 알려졌다. 또한 진료 이외 영어 교재를 한글로 번역했으며, 근대적 위생 교육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평양에서 일한 지 10개월 만에 3,00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과로로 폐질환에 걸려 1910년 4월 13일, 34세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와 함께 일했던 로제타는 “그녀는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을 다해 환자를 돌본 박에스더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의 고통을 구제하는 병원,

그러한 병원들이 많이 세워져 많은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박에스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