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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문화약국]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작성자
admin
2022-06-23
조회
210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내 두 다리로, 나만의 속도로 걷기 영화 『걷기왕(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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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심한 멀미로 세상의 모든 교통수단을 탈 수 없는 ‘만복’이란 소녀가 있다. 고등학생이 된 ‘만복’은 버스를 타지 못해 두 다리로만 왕복 4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 다닌다. 지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수업 내내 잠을 자기 일쑤인 소녀 만복. 수업 태도나 지각 등 만복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껴왔던 담임 선생님은 만복이 4시간 거리를 걸어 통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잘 걷는 만복에게 꿈과 열정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육상을 해볼 것을 추천한다. 매사 의욕 없이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던 만복에게 육상부 생활은 쉽지 않지만, 점점 욕심이 난다. 과연 만복은 생애 첫 노력과 열정으로 ‘꿈’이라는 것에 다다를 수 있을까?


 


열정 과잉 시대, 달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

‘갓생(신을 의미하는 ‘God’과 인생을 뜻하는 ‘생(生)’의 합성어로 부지런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뜻하는 신조어)’, ‘미라클 모닝(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 공부 등 자기 계발 활동을 하는 트렌드)’ 열풍처럼 성공과 자아실현을 위해 좀 더 독하게, 좀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꿈과 노력의 가치가 점점 과열되고 있는 모습이다. 모든 것은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 하지만, 노력과 열정은 그렇지 않다. 열정 과잉 시대에서 우리는 모두 원대한 꿈을 꿔야 하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채근하고 노력할 것을 강요 받는다.


“그래도 끝까지 해봐. 중간에 관두는 거 그거 나쁜 습관이야.

“아, 근데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잖아요.

저도 제 나름대로 노력 많이 했거든요.”

“만복아. 노력엔 끝이 없단다.”

- 담임 선생님이 만복에게, 영화 『걷기왕』 중에서


영화 속 담임 선생님은 말한다. 꿈과 열정만 있으면 뭐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중요한 것은 꿈을 향한 열정과 간절함이라고. 꿈과 열정을 강요하는 외부 환경에서 그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은 ‘수지’다. 수지는 소년 체전 3관왕 출신의 마라톤 유망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부상으로 더 이상 육상을 할 수 없게 된 인물이다. 하지만 수지는 육상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마라톤 대신 경보를 택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죽을 각오로 목숨 걸고 하면 된다는 수지에게 단지 잘 걷는다는 이유로 갑자기 육상부에 들어온 후배 ‘만복’은 눈엣가시다. 열정도, 노력도 없이 긍정적인 만복의 모습이 같잖을 뿐이다.



“네가 왜 안 되는 줄 알아? 이거 목숨 걸고 해도 제자리도 지키기 힘들어.

근데 넌 맨날 장난처럼 하잖아.

너처럼 하면 아무것도 안 돼. 다들 그렇게 한다고. 너만 빼고”

- 수지가 만복에게, 영화 『걷기왕』 중에서


육상부 선배 ‘수지’의 말에 만복은 상처를 받고, 만복은 처음으로 꿈과 노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만복은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다들 뭔가 될 것 같은데 나만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나 혼자만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복이는 불안해졌다.

- 영화 『걷기왕』 중에서


꿈과 열정을 강요하는 담임 선생님, 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육상부 선배 ‘수지’, 노력하지 않는 자기 모습에 불안을 느끼는 ‘만복’. 영화 『걷기왕』의 인물들 속에서 때로는 담임 선생님이, 때로는 수지가, 때로는 만복이 되어 끊임없이 달릴 수밖에 없고, 불안을 만들어 내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적당히 해도 괜찮아. 느려도 괜찮아. 걸어도 괜찮아.”

더 열심히, 더 빨리, 더 잘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우는 경쟁 사회에서 영화 『걷기왕』은 ‘괜찮다’는 위로의 메시지를 건넨다.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달리기를 강요 받는 어른이들에게 괜찮다고, 숨이 차면 걸어도 된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무한한 위로로 다가온다.

어른이들을 둘러싼 사회는 항상 말한다. 괜찮지 않을 거라고.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면, 길을 잘못 들면 괜찮지 않을 거란 그 말은 우리 내면에 실체 없는 불안을 만들어낸다. 달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어떤 길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 채 단지 남들보다 좀 더 앞서기 위해 무작정 달리고 있다.



“아, 근데 왜 이렇게 빨리 달렸던 걸까?

어쩌면 그냥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 영화 『걷기왕』 중에서


영화 속 만복의 모습 그 자체가 필자에게는 ‘괜찮다’는 위로가 됐다. 뛰다 넘어져 울음이 터질락 말락 한 아이에게 많은 어른은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한다. ‘괜찮다’는 말에는 넘어져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위안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만복을 보며 누군가에게 ‘괜찮다’란 말을 들은 적이 언젠지, 더 나아가 나 스스로 ‘괜찮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됐다.


“저기요, 저기요! 계속 뛸 거예요, 말 거예요?”

“아니요, 그만할래요.”

- 영화 『걷기왕』 중에서


평생을 경쟁하며 뛰어왔던 우리에게 노력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달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페이스에 맞춰 뛰느라 고꾸라질 때도 여러 번이다. 영화를 본 후, 느리더라도 어디든 갈 수 있는 만복처럼 나도 내 두 다리로, 나만의 속도로 어디든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용기가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오늘 저녁엔 산책하러 가야겠다. 한참을 걷고 싶다.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여 시원해진 여름밤 공기를 만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