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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주치의] 거닐기 좋은 날, ‘손 없는 날’

작성자
admin
2021-03-30
조회
874

거닐기 좋은 날, ‘손 없는 날’


봄이 오면 매우 바쁜 곳이 있다. 바로 이사업체다. 추운 겨울 동안 움츠렸던 사람들이 봄을 맞아 부동산을 찾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봄철 새 학기를 앞두고 이사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항상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손 없는 날’이다. ‘손 없는 날’이라.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말일 수 있다. 막연히 이사하기 좋은 날 정도로 알고 있으면 반쯤 맞다. 그렇다면 왜 ‘손 없는 날’이 이사하기 좋은 날이 된 것일까? 



‘손 없는 날’의 ‘손(損, 덜 손)’은 ‘손님’의 줄임말로, 날수(日數)에 따라 동서남북 4방위로 돌아다니면서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해코지하는 악귀나 악신을 말한다. 이 귀신은 날짜에 따라 방향을 바꿔 옮겨 다닌다고 한다. 이와 달리 『주역周易』의 팔괘(八卦) 중 다섯 번째 괘인 손괘에서 유래하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때 손괘는 바람(風)과 출입(出入)을 상징한다.1) 그렇다면 ‘손 없는 날’은 어떻게 가려낼까? 의외로 간단하다. 


가령 음력으로 끝수가 1 또는 2인 날은 동쪽에서, 끝수가 3 또는 4인 날은 남쪽에서, 5 또는 6인 날에는 서쪽에서, 7 또는 8인 날에는 북쪽에서 악귀가 활동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손 있는 날이나 방위’에 이사, 집수리, 혼인, 개업 등을 하다가는 큰 재앙을 당한다고 믿어 왔다. 


반면, 마지막 9와 0이 들어가는 날은 ‘손’이 하늘에 올라가 있어서 어떤 방위에도 ‘손’이 없게 된다. 즉 ‘손 없는 날’은 이렇게 10일 간격으로 돌아다니는 귀신이 지상에 없어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길한 날로서, 음력으로 끝수가 9거나 0인 날, 즉 9일, 10일, 19일, 20일, 29일, 30일이 된다. 그래서 이날은 산소를 돌보거나 묏자리 고치기, 이사, 집수리 같은 일을 하기 좋은 날로 본다. 또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여 한 해 동안 먹을 장을 담그기도 한다. 특히 ‘손 없는 날’ 중에서도 음력 2월 9일은 ‘무방수날’이라 해서 어떤 일을 해도 ‘해(害)’가 없는 날로 여겼다. 무방수날에는 ‘성주단지를 뒤집어 놓아도 집안에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는다’ ‘신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해가 없는 날로 여긴다. 


‘손 없는 날’의 유래 


'손 없는 날'은 처음엔 인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불교의 한 종파인 인도 밀교에서 천문학을 다뤘고, 그 영향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 대한 악귀 설이 나왔는데, 이 믿음이 임진왜란 당시 불안한 사회 분위기를 틈타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안한 상황에 뭔가를 믿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2) 17세기 초 경상도 현풍에 살았던 곽주(郭澍)와 그 가족들이 쓴 한글 편지 『현풍곽씨언간』에서 말(馬)을 보내는 날로 ‘손 없고 조용한 날’을 꼽는 것을 볼 때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행사 택일을 할 때 ‘손 없는 날’을 두루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3)


1) 김만태, ‘손 없는 날’, 『한국민속대백과사전』

2) “[취재파일] ‘손 없는 날’ 믿어야 하나?”, SBS 뉴스, 2013.02.18. (최종방문, 2021. 03. 04.)

3) 김만태, ‘택일 (擇日)’,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세계 속 ‘길일(吉日)’의 이모저모


일본의 六曜(육요)[ろくよう, 로쿠요] 


일본도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대부분 신경쓰지 않지만, 큰 행사를 비롯하여 날을 고를 때 좋은 날을 정하여 행사를 한다. 일본 달력에는 날짜 밑에 작은 글씨로 한자가 적혀 있는데 그것이 바로 ‘六曜(육요)[ろくよう, 로쿠요]’다. 


먼저 요일(曜日)이란 단어에서 요(曜)란 글자는 ‘빛난다’는 뜻이다. 태양을 가리키는 일(日)과 깃 우(羽), 새 추(隹)로 구성되는 요(曜)는 날개를 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새를 나타낸다. 이집트 신화에서 매일 동쪽에서 날아올라 서쪽 바다로 떨어져 죽은 뒤 다음 날 다시 살아나는 불사조(phoenix)로, 바로 태양을 의미한다.4)


일본에서는 이처럼 6일 동안 태양의 뜨고 짐을 한 주로 여기는 육요(六曜)라는 전통이 있다. 이러한 육요(六曜)는 14세기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어 에도 시대에 이르러 유행한 것으로 알려진다.5) 이 전통에 따라 아직도 일본의 민간 달력에는 이 방식을 표시하여 사용하고 있다. 六曜(육요)는 달력을 6일로 세분화하는데, 매일이 행운과 불행과 관계가 있어서 하루를 시간대에 따라 나누기도 한다.



六曜(육요)는 ‘先勝[せんしょう, 센쇼오] → 友引[ともびき, 토모비키] → 先負[せんぶ, 센부] → 仏滅[ぶつめつ, 부츠메츠] → 大安[たいあん, 타이안] → 赤口[しゃっこう, 샤코우]’의 순으로 반복


‘센쇼오(先勝)’ : ‘앞서면 반드시 이긴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라도 급히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오전은 좋지만 오후는 좋지 않다고 한다.


‘토모비키(友引)’ : 승부의 결판이 나지 않는 날이다. 흉사에 친구를 이끈다는 의미다. 이날은 친구를 끌어당긴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기 좋은 날이라고 하며 오전 오후는 좋지만, 정오는 좋지 않다고 한다. 


‘센부(先負)’ : 앞서가면 언제나 진다는 뜻으로 급한 것을 피해야 하는 날이다. 오전은 좋지 않고 오후는 좋다고 한다. 


‘부츠메츠(仏滅)’ : ‘부처님의 공덕도 없다’는 것으로 만사에 흉하다는 대흉일이라는 의미로 모든 일을 삼가는 날이라고 한다.


‘타이안(大安)’ : ‘매우 평온하다’는 의미이고 가장 좋은 날이기에 결혼, 여행, 개점, 이사, 자동차 등록 날짜와 출고 날짜, 건물의 기초 공사 착공 등을 이날에 하면 모든 것이 잘된다고 한다. 


‘샤코우(赤口)’ : 정오 전후인 11시부터 13시까지를 제외하면 모든 일이 풀리지 않는 흉일을 의미한다. 결국 타이안(大安)이 우리로 따지면, 이사하기 가장 좋은 ‘손 없는 날’에 해당한다.


 


 


중국의 길일(吉日)


중국의 길일은 16일과 18일이다. 16은 중국어로 원래 十六[shíliù, 스리우]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숫자 幺(1)은 [yāo, 야오]라고 발음해 幺六[Yāo liù, 야오리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발음은 ‘즐겁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要乐[Yào lè, 야오르어]와 발음이 비슷해 중국인들은 16일을 즐겁고 좋은 날로 여긴다. 또 18일은 원래 十八[Shíbā, 스바] 또는 幺八[Yāobā, 야오바]라고 하는데, 要发[Yàofā, 야오파]와 발음이 비슷해 중국인들은 부자가 된다는 의미로 간주하여 길일로 여긴다.6) 물론, 좋아하는 숫자가 들어간 전화번호나 자동차 번호판 등이 비싼 값에 매매되는 일도 흔하다. 중국 또한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이사, 결혼, 개업 등 주요 행사의 날짜를 정할 때 길일을 따른다.


 


캐나다의 이사의 날


의미는 다르지만, 캐나다 퀘벡 주에서도 ‘손 없는 날’이 있다. 바로 캐나다 건국 기념일인 ‘캐나다 데이’로 7월 1일이다.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날인데, 퀘벡 주민은 이날을 ‘이사의 날(moving day)’로 기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때 대략 주민 27만 명이 동시에 이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임대차 계약 종료일이 각기 다르지만, 퀘벡 지역 주민의 임대차 계약 종료일은 7월 1일로 동일하다. 그래서 퀘벡 지역 주민은 6월 말에 계약이 끝나면 7월 초 이사 시즌에 새집으로 이사한다.7) 

캐나다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뉴프랑스 정부는 캐나다의 혹독한 겨울 동안 세입자들이 쫓겨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1750년 임대차 계약 시작일은 무조건 5월 1일로 했다고 한다(현재는 7월 1일이 이사의 날이 되었지만).8)


 


각국의 풍습이 되어버린 ‘손 없는 날’은 어찌 보면, 과학적이기도 하면서 비과학적이기도 하고, 전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 인간의 공포심과 기복 사상이 결합된 구시대적 유물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 나라의 역사와 풍습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되는 흥미로운 주제임은 분명하다.


 


4) “[생활속의 전통(傳統)사상] ‘음양’을 의미하는 日·月에 ‘오행’ 火 水 木 金 土 합해 7일”, 경상일보, 2016.02.15. (최종방문, 2021. 03. 04.)

5) フリー百科事典, “六曜”, (최종방문, 2021. 03. 04.)

6) “‘손 없는 날’ 다른 나라도 있을까?”, 상하이저널, 2019. 12. 28. (최종방문, 2021. 03. 04.)

7) “[커버스토리]퀘벡, 프랑스가 숨쉬는 곳”, 동아일보, 2009. 09. 11. (최종방문, 2021. 03. 05.)

8) DANA SCHULZ, “Moving Day: When ALL New Yorkers moved on May 1st”, 2020. 5. 1. (최종방문, 2021. 03.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