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과학주치의] “억울한 죽음은 없도록 하라” 무원록(無寃錄)

작성자
admin
2021-02-01
조회
90

“억울한 죽음은 없도록 하라” 무원록(無寃錄)


누명 


2020년 12월 17일, 연쇄살인범 이춘재가 저지른 연쇄살인사건(이하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20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윤성여 씨가 사건 발생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53세인 윤성여 씨는 지난 1988년, 이춘재가 저지른 여덟 번째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 동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피해자다. 이춘재의 자백으로 재심이 시작된 지 1년 여. 재심 선고 공판에서 검찰은 윤 씨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며 무죄를 구형했다. 재판부 또한 무죄를 선고하며 “법원이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윤 씨에게 사과했다. 필자는 사소하게 모함을 당했을 때조차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고문과 허위 자백으로 씌워진 누명의 억울함이 어찌 온전히 풀릴 수 있을까? 현대의 형사사건도 이러할진대, 문득 과거에는 어떻게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였을지 궁금해진다. 의학, 과학이 발달하기 전 조선시대에는 과연 억울한 누명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1751년 6월 19일, 처음에 덮었던 포대 2장을 제거하니 다음으로 베적삼 하나, 다음으로 무명 바지 하나 등의 옷이 입혀져 있었다.” 

“나이는 35, 36세가량 남자. 신장이 5척이고 머리털 길이가 2척이고 두 눈이 반쯤 열렸고 입이 반쯤 열렸고 혀가 이[齒]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온몸에 색깔이 엷은 황색이다.” 

“전면[仰面]의 상처는, 머리 부분 오른쪽에 칼자국이 있는데 길이가 1촌 1푼이고 넓이가 3푼이고 깊이가 2푼이고 혈액이 흐르고 부드럽다.” 

“후면[合面] 상처는, 왼쪽 눈꺼풀[眉膊] 위에 찰과상 한 곳은 사선의 길이가 1촌 2푼이고 넓이가 1푼이고 색깔이 엷은 자줏빛이고 매우 단단하다.” 

“시험으로 은비녀를 사용하니 색이 변하지 않았다. 흰밥 한 덩어리를 입 안에 넣었다가 도로 꺼내어 닭에게 먹였는데 닭이 또한 죽지 않으니 실인(實因)은 맞아서 죽은 것이 확실하다.” 


출전: 『영영일기(嶺營日記)』 부분 발췌 | 저자: 조재호(趙載浩) 

시기: 1751-06-19~ | 장소: 경상남도 함양군 




 


조선시대 검시제도 


조선시대 사료를 통해 당시의 검시 내용을 잠깐 들여다보자. 

『영영일기』는 조선 영조 대 경상감사였던 조재호가 쓴 관직일기인데, 그중 살인사건 기록의 일부분이다. 위 내용은 1751년 6월 18일, 오후 3~4시경 안음현(安陰坼, 오늘날 경남 함양군) 고현면 기찰(譏察)인 김태건(金太巾)과 북리면 기찰인 구운학(具云鶴)이 살인사건이 났음을 신고하면서 시작된다.1) 

지면상 일부 내용만 적시하였지만, 실제 전문은 사건 접수에서부터 검시 과정까지 현장감 넘치는 묘사를 통해 매우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각 증인들의 진술을 논리적으로 평가하여 진위 여부를 판단하고, 당시의 법의학서에 기초하여 검시 결과를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등 그 수준이 상당하다. 다소 과장하자면, 작성 형식만 다를 뿐 오늘날 수사기록에 견줄 만하다. 


 


조선시대 과학수사 매뉴얼 - 법의학 지침서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조선 시대에도 죽은 자의 원통함과 남은 가족들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한 ‘과학수사 매뉴얼’이 있었다. 바로 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저술한 『무원록(無寃錄)』(1308년)이다. ‘세종’은 이 지침서를 수사에 적극 활용하기 위해 여러 신하들에게 해설을 명하였고, 이에 신하들은 무원록에 주해(註解)를 더하고 음훈(音訓)을 붙여 1438년 11월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완성하였다. 『신주무원록』에는 시체 검안에 관한 규정, 원나라의 판례문, 시상변별(屍傷辨別)에 관한 사인들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조’ 때 이르러 신주무원록에 내용을 추가하여 1748년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이 편찬되었고, 이 후 ‘정조’ 때인 1796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두 종의 법의학서 『증수무원록대전』과 『증수무원록언해』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둘은 1905년 『형법刑法』이 반포된 이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검시 지침서로 활용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그 가치가 어찌나 대단했을지 쉬이 짐작이 가지 않는다.2) 


 


  

▲ (좌) 규장각 소장 『신주무원록』 (奎貴 12120) 3)

 (우) 은비녀와 흰밥을 이용해 시험하니 독살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4)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06-19~ 


 


조선시대의 객관적 수사절차 


조선시대 법의학서인 ‘신주무원록’에 따라 검시한 내용을 살펴보면 수사절차에서 그 객관성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현대와 마찬가지로 살인 등 변사(變死) 사건이 발생하면 신중하고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 수사가 진행됐다. 당시 수사절차를 살펴보면, 일단 사건이 발생하면 사망 장소 관할 수령은 아전을 데리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수사와 검시를 해야 했다. 즉, 시체를 검사하는 검시 책임자는 고을 수령이었는데, 수령은 시신을 다루는 일부터 관련자 신문(訊問)까지 제반 실무를 지시했다. 


수사의 핵심은 첫째로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 둘째로 목격자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검시를 맡은 수령은 왜 죽었는가를 밝히는 문제에 더 집중했다. 사망에 이르게 된 직접적 원인을 알아야, 적어도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령은 사망자 가족, 피의자, 관련자와 목격자, 주위 사람 등에게 1차 심문을 하여 진술을 확보한 뒤 시체에 1차 검시(초검, 初檢)를 했다. 이것이 끝나면 다시 앞서 조사한 사람에게 2차 심문을 했다. 이어 심문과 검시를 종합해 자기 의견서를 붙여 감영에 보고했다. 검시 횟수에 따라 초검·복검(覆檢, 2차 검시) 등이라고 하는데,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초검은 시신이 놓인 장소의 관할 수령이 담당하고, 복검은 이웃 고을의 수령이 담당했다.5) 살인 사건의 현장에는 반드시 두 명의 조사관이 파견되어 조사하였으며, 양자의 결론이 일치할 때만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러 차례 다른 검시관이 조사를 하였다. 그렇게 해서도 확정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으면,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조사관의 자질과 수사과정을 심문하였다. 


 


살인 사건의 과학적 추론


신주무원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과학적 원리에 따라 살해 방법을 추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사체를 사건 현장에 그대로 두고 검시하여 사인분석에 참고하였다. 특히 살인의 실제 원인, 즉 칼에 찔려 죽은 것인지, 독살인지, 구타에 의한 사망인지를 구별하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피살체의 보존과 조사 방법이 매우 중시되었다. 조사해야 할 신체 부위만 해도 앞부분 50군데, 뒷부분 26군데 해서 총 76군데가 있었고,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가면서 조사했는데, 얼마나 기록이 상세한지 그것만 보고도 당시의 복장을 재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TV 드라마에서 한 번쯤 봄 직한 장면이기도 하나, 예를 들면, 독살의 혐의가 있을 때 은비녀를 목구멍에 집어넣어 색의 변화를 살피거나(‘은비녀법’), 밥알을 입안에 가득 넣어두었다가 한참 후에 꺼내 닭에게 먹여 독살인지 여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반계법’). 이 방법은 앞서 『영영일기』에서 기재된 살인사건에서도 실제 활용되었음이 확인된다. 


검시를 할 경우에는 술지게미와 같은 초(醋) 성분으로 사체를 깨끗이 닦아냈다. 또 사체의 상흔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우 감초 달인 물로 닦아내어 그 흔적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살인 현장에서 흉기로 의심되는 칼을 발견했으나 범행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 칼을 숯불에 달군 뒤 고농도의 식초로 칼날을 씻었다. 이렇게 하면 선명한 핏자국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혈액의 단백질 성분이 산에 노출될 때 응고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목을 맨 경우와 타인이 끈으로 목을 조른 경우는 각각 끈 자국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국 외에도 서까래의 올가미 흔적과 먼지 유무도 함께 살펴봐야 사인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하였다6). 익사한 시신은 입과 코에서 하얀 물거품이 나오는 것으로 봤다. 만약 하얀 물거품이 없으면 이미 죽은 시신을 물에 빠뜨린 것으로 보았다7).

또한 시신이 붉은색을 띠면 구타나 목을 맨 상처일 가능성, 푸른색이면 독살 혹은 질식사, 노란빛이면 병사, 검은색이면 시신이 부패한 것, 흰색의 경우 동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과학의 발달과 미래의 무원록


“in dubio pro reo(인 두비오 프로 레오)”.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바로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중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라며 피의자를 쉽게 예단한다.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이 미궁에 빠졌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이춘재의 혈액형과 발자국이 사건기록과 달라 이춘재가 수사 선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8차 사건 재심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서의 중대한 오류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 내지 오판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독자들도 본인이 그 억울한 1인이 될 수 있음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영국의 법률가 William blackstone은 이러한 명언을 남겼다. “It is better that ten guilty persons escape than that one innocent suffer”(열 명의 범죄자가 도망치는 것이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고초를 겪는 것보다 낫다). 인간은 단지 실체적 진실을 추구할 뿐,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진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조선시대 선조들이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부단히 노력한 것처럼, 현재 혹은 미래의 과학수사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제2의 윤성여 씨가 등장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1) 한국국학진흥원, ‘신주무원록에서 밝힌 격식에 따라 시장에 검시 내용을 기록하다’.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JJM_2157#self) 

2) 김호, ‘조선시대의 무원록(無寃錄)과 법의학’ 

3) http://kyujanggak.snu.ac.kr/home/brd/BrdView.do?siteCd=KYU& menuId=279&postSeq=11605

4)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법의학’, 2018. 7. 

5, 6) 이재우, ‘조선시대의 검시와 21세기 과학수사’, 2017

7)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법의학’, 201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