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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문화약국]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작성자
admin
2022-05-27
조회
420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ㆍ이어령 지음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라스트 인터뷰 중



‘시대의 지성’이 남긴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주말의 단잠이 가시지도 않았던 2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 주요 신문 1면마다 이어령 선생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시대의 지성이자 한국 사회의 큰 스승이었던 어른의 별세 소식에 많은 이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를 모은 책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문화부 장관이자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교수, 문화기획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족적을 남긴 이어령 선생의 생(生)과 그와 맞닿아 있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이 지나온 과거를 비유적으로 발자취라고 부른다. 누군가의 발자취는 길이 기억되며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기도 하고, 누군가의 발자취는 소리 소문도 없이 왔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어령 선생처럼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발자취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모두 크든 작든 각자의 인생에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고 있다. 여유 없이 바쁜 하루. 정신없이 몰아치는 시간에 나를 맡기다 보면, 나 스스로 매일 매일 새기고 있는 인생의 발자취가 희미해질 때가 있다. 지금 잘살고 있는 것인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걸어 나가야 하는지. 삶은 유한하지만, 죽음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기에 오늘 그리고 내일이 계속될 것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에 대한 내비게이션은 잠시 꺼둔 채 살아가곤 한다.


“인간은 암 앞에서 결국 죽게 된다네. 이길 수 없어. 다만 나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말을 하겠다는 거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나가면 그게 암을 이기는 거 아니겠나. 방사능 치료 받고 머리털 빠지며 이삼 년 더 산다 해도 정신이 다 헤쳐지면 무슨 소용인가. 그 뒤에 더 산 건 ‘그냥’ 산 거야. 죽음을 피해 산 거지. 세 사람 중 한 명은 걸려서 죽는다는 그 위력적인 암 앞에서 ‘누군가는 저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하는 그 모습을 남은 시간 동안 보여주려 하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마지막까지 죽음의 관찰자가 돼 삶의 의미와 교훈을 전하고자 한 이어령 선생의 발자취를 통해, 잠시 꺼두었던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다시 켜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두 발로 나의 발자국을 오롯이 남기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고.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항상 ‘둥근 돌’이었다. 모난 돌이 되어 맞기보다는 둥근 돌이 되어 여러 돌 틈에 끼인 삶이 편안했다. 마음 한쪽에는 항상 ‘왜’라는 질문이 따라다녔지만, ‘왜’라기보다는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다음을 쉽게 만들었다. 생각하고 그걸 꺼내어 표현하는 삶을 살았던 이어령 선생은 인생이 외로웠다고 말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사는 사회에서 존경은 받았지만 사랑받지는 못했다고 덤덤히 고백하는 그의 모습에서 ‘둥근 돌’이 되어 숨어 있던 나의 편안함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둥글둥글,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세계에선 관습에 의한 움직임은 있지만, 적어도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자가 발전의 동력은 얻을 수 없어. 타성에 의한 움직임은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고. 작더라도 바람개비처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기만의 동력을 가지도록 하게.”

“자기만의 동력이요?”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아.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생각이 많으면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가벼워진다고요?”

“생각이 날개를 달아주거든. 그래비티, 중력에 반대되는 힘, 경력이 생기지. 가벼워지는 힘이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생각하지 않으면 편한 사회에서 생각하는 삶을 산다는 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법을 배웠을 뿐, 나 스스로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고 표현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구성원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방법 중 하나였고, 배려라고 배웠다. 이어령 선생은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하늘을 나는 새도, 살아 있는 물고기도 모두 바람과 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간다고.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밀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작은 송사리라도 위로 올라간다는 선생의 말씀에 사유하는 한 인간으로서 ‘나답게 사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선생님, 럭셔리한 삶이 뭘까요?”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잘 사는 것일까. 그 고민의 해답 역시 스승의 오랜 연륜과 지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야기가 있는 삶. 나만의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삶.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그저 그런 시시한 이야기가 아닌 사소하지만 유쾌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해본다. 머리는 굳고 요령만 생겨 ‘겉멋’에 취한, 얼핏 보면 화려해 보이는 삶을 사는 어른이 아닌 소소하지만 담백하게 인생의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는 진짜 어른으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


“이런 역설을 모르면 인생 헛산 거라니까.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 깨면 죽는 거야. 내가 왜 남은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겠나?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유언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네.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인생이라는 길 위를 이곳저곳 거닐며 방황하고 떠돌아다니는 여행자가 될 것인지, 프로세스는 생략한 채 목표에 도달하는 승객이 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다만, ‘죽고 나서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라는 선생의 물음과 같이, 살아 있어도 죽은 삶이 아닌 사유를 밑거름 삼아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는 동력을 만드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88년이라는 인생에서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가며 살아온 선생의 발자취처럼,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자기 내면에 물음표를 던지고, 이를 느낌표로 만들며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는 그런 한 ‘생명’이고 싶다.


※ 2022년 6월 동아약보 발췌